인사말

쓸모없는 생명이 있겠습니까. 생명은 그 스스로 존재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죽나무나 참죽나무의 경우 어려서는 그 뒤틀림으로 서까래로 쓰기에 적당하지 않아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커서도 울퉁불퉁한 탓에 대들보감으로 부적절해 도끼날을 피해 살아남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무는 서까래나 대들보를 부러워하지도 않고 쓸모없는 나무라고 자책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오랫동안 거목으로 살아남아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속담처럼 또 다른 의미의 큰 역할을 묵묵히 수행할 뿐입니다. 나무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 것이 더 의미 있는가 하는 것은 사람들만의 셈법일 뿐, 나무는 그 푸르름만으로 말이 없습니다.

도시의 사냥꾼들이 격돌하는 콘크리트 숲에서 인간의 탐욕에 실망할 때마다 태고의 원시적인 바람과 향기가 넘실대는 거대한 나무의 숲을 만들어 포근히 안기고 싶은 야무진 희망을 꿈꾸었습니다. "출판언론에 성공하지 않았느냐", "사회개혁은 외면하고 그 잘난 책장사만 계속할 거냐"며 주위에서 부추기거나, 정치권력이 유혹의 손길을 뻗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고 다짐했고, 스스로의 중심을 잡기 위해 묘목을 일구는 노동으로 제 자신을 학대했는지 모릅니다. 눈앞의 이익에 핏발 선 탐욕의 눈동자를 외면하는 방법은 밀린 원고더미 속에 푹 파묻히거나, 자라는 나무들과 대화하는 일에 스스로를 내모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나무와 벗한 지 10여 년, 귀천(歸天) 전까지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여생을 보낼 곳을 드디어 마련하게 됐습니다. 20만 평이 조금 못 되는 이곳 '아름다운 나남의 숲'엔 5리가 넘는 맑은 실개천과 50년을 훌쩍 넘긴 잣나무, 산벚나무, 참나무, 쪽동백, 100세 수령을 자랑하는 산뽕나무, 팥배나무 등이 어우러져 태고의 음향을 발하고 있습니다. 또 수목원 곳곳에 헛개나무, 밤나무, 느티나무, 자작나무 묘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벌개미취가 광활하게 춤추는 야생화 꽃동산도 있습니다. 아직 군데군데 다듬어 나가야 할 곳이 적지 않지만 당당하게 여러분께 선뵈려 합니다.

다시 한 번 '아름다운 나남의 숲'을 찾아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언제나 좋은 일만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나남출판 대표, 나남문화재단 이사장, 아름다운 나남의 숲 설립자 조상호

출판의 길 40년

아름다운 숲, 나남수목원

세상 가장 큰 책

세상을 향해
종이 위에 침묵의 말
건네던 사람
언제부턴가
더 큰 침묵의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돌멩이로 모음을 쓰고
나뭇가지로 자음을 썼다
흐르는 계곡의 물과
능선을 넘어온 바람으로
줄거리를 만들었다

책은 나무가 산고 끝에
잉태한 아들
평생 책이 아들이었던 그는
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듯
나무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릴 때
구상나무 심고
세상이 그리울 때
빠알간 복자기 심었다

세상이 답답할 때는
쭉쭉 뻗는 낙엽송 심었고
세상에 고함치고 싶을 때는
활활 타오르는
자작나무 심었다

때로 그를 시샘한 세상이
폭우를 쏟아부어
나무를 덮칠 때는
뒹굴던 돌을 쌓아
세상의 역류를 막고
흔들리는 마음
단단히 가두었다

마침내
세상 가장 큰 책을 쓰고는
흙 묻은 등산화에
낡은 청바지를 입은 그도
한 그루 느티나무 되어
책 속의 쉼표로 찍혔다
겨울에도 푸른 쉼표로.

- 임병걸 시인(2013)